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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나무의 미술광장
박찬경- 모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현대차 시리즈 2019 본문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전시가 열렸다. 2014년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10년간 매년 1인의 우리나라 중진작가를 지원하는 연례 프로젝트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바로 작가 박찬경이다. 박찬경은 이 시리즈의 6번째 선정 작가인데, 2014년 첫 해 작가 이불을 시작으로, 안규철(2015), 김수자(2016), 임흥순(2017), 최정화(2018) 작가가 이 프로젝트와 함께 했다.
전시명: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모임 Gathering》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전시실
기간: 2019.10.26.- 2020.02.23.
관람료: 통합관람권 4,000원(무료 대상의 폭이 넓으니 꼭 홈페이지 확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작가 박찬경은 박찬욱 감독의 동생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부가 설명을 과연 작가가 좋아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 속에 펼쳐진 미적 심미안을 볼 때 미술 쪽과 연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도 집안 분기를 보면 미술계 쪽과 관련이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내가 작가 박찬경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그가 쓴 미술 평론에 관한 글을 통해서였다. 10여 년도 더 된 일인데, 그때 '아 이 사람 글을 참 잘 쓴다'라는 느낌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모임 Gathering≫은 한국미술과 재난의 이야기이다. 근대성의 총체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재난 이후 또는 그 와중에, 미술은 어떤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 -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들은 미술관이나 미술사, 미술 언론 등의 근대 미술제도를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한국의 근현대사 전체가 서구 문명의 절대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 미술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제도 비판의 결핍이 "한국 미술문화의 뿌리 깊은 식민성인 동시에 한국적 현대성"의 핵심이라 진단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바로 만나게 되는 <작은 미술관>은 22점의 이미지와 1점의 유화작품, 그리고 화랑과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문제의식과 직접 연결되는 공간으로 작가가 선택한 작품(사진)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본래 맥락에서 떨어져 작가의 해석에 따라 재배치된다.
작가는 벽면에 주석과 메모를 직접 적어 넣고, 벽에 창과 문을 뚫어 익숙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관람자들은 작가가 주관적으로 구성한 미술사를 마주하면서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이때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사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미술 작품에 고유한 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이미 신화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서구 중심의 미술사가 한국미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작가는 낮은 담장과 정원, 병풍, 주련 등 전통 건축의 요소들을 빌려 미술관 속에 또 다른 미술관을 지었다.
<작은 미술관>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립 과정 영상이 포함되어 있다.
건립 당시 4명의 건설노동자가 화재로 숨진 내용이 나오는데, 이 전시를 통해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영상에는 이들의 넋을 기리고 안전을 기원하는 굿 장면도 등장한다.
"조선 시대의 종친부, 일제 강점기의 병원, 군사정권 시대에는 정보기관으로 사용된 장소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한국의 정치사와 현대미술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작은 미술관>이라는 '담장'을 지나면 '마당'의 개념을 가진 공간이 펼쳐진다. 조선 시대 정원에 있는 연못처럼 마당 한가운데에는 물을 여러 양식으로 재현해본 시멘트 조각 <해인>이 바닥에 놓여있다.
'해인'이란 뜻은 세계를 비추는 바다를 통째로 명상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선불교 용어라고 한다. 작품 <해인>은 다양한 물결 패턴을 새긴 시멘트 판 16개와 한옥 폐자재에서 수거해 온 마루로 구성되었다.
전시의 심장부인 <해인>에서는 전시 기간 중 강의가 열린다. 연구자들을 초대해 전통과 동시대 미술, 근대 미술제도, 재난과 재현 등 전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 내용은 녹음되어 마루에 앉아 들을 수 있다.
"미술은 미술에 대한 대화"라는 작가의 시각을 반영한 구성이라고 한다.
한쪽에는 두 개의 영상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같은 주제의 작품인가?' 생각하고 보니 서로 다른 작품이다.
오른쪽 영상은 이번 전시에 포함된 유일한 구작으로 <세트>(2000)라는 작품이다. 남한과 북한의 영화 오픈 세트, 군부대 시가전 훈련장을 찍은 150여 장의 사진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허구적 연대기로 구성하였다.
왼쪽 영상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2019)는 최근에 일어났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다루며 방사능 오염지역의 일상적 풍경과 재난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귀환곤란지역'에서 작가가 찍어온 사진과 '오토래디오그래피'라는 기법으로 방사능 피폭의 위험을 다루어 온 일본 사진작가 카가야 마사미치의 이미지가 교대로 비친다. 평범해 보이는 시골마을의 풍경과 과학적 수단을 빌려, 재난지역을 보는 두 시선을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다.
<세트>(2000)와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2019)의 두 영상은 대구를 이루며 나란히 전시되고 있는데, 이 두 '다큐멘터리'는 픽션 영화인 <늦게 온 보살>(2019)의 배경을 이룬다고 한다.
<늦게 온 보살>(2019)의 상영실에 들어가기 전 입구 좌우에는 글이 쓰인 두 개의 기둥이 있다. <주련>(2019)이라는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문에 있는 기둥 형태를 따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쓰일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하나는 원기둥, 다른 하나는 사각기둥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올 때마다 대충 훑어보고 지나다녔는데, 이제는 이곳에 올 때마다 정문의 기둥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될 것 같다.
사각기둥에 쓴 "지옥은 텅 비었다. 모든 악마들이 여기 와 있으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나오는 구절이고, 원기둥에 쓰여있는 문장 "지혜의 눈으로 보면 지옥은 텅 비어있다"는 불교 경전 『천수경』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두 문장을 인용한 것은 안에서 상영되고 있는 <늦게 온 보살>에 겹쳐진 두 가지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늦게 온 보살>은 누군가의 죽음(또는 석가모니의 열반>을 재난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설정하고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반응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장편영화에 가까운 이 영상은 대부분 흑백 네거티브로 되어있다. 실제로 보면 묘하고 굉장히 몰입해서 볼 수 있다.
작가는 우리나라의 여러 사찰을 다니며 쌍림열반도(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여덟 개의 그림인 팔상도의 마지막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원래의 장면에서 떼어 낸 동물들을 프레임을 둘러 설치했고, 벽의 색은 사찰에서 단청을 칠하기 전에 바탕색으로 쓰는 안료인 뇌록과 가깝게 칠했다고 한다.
전시되어 있는 동물들은 대부분 최근에 조성된 사찰 벽화에 있는 것으로, 전통의 방식과 현대의 만화 스타일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작품 <5전시실>은 현재 이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전시실을 1:25로 축소한 모형과 벽에 쓴 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립 과정을 담은 비디오, 그리고 국악기 징과 꽹과리로 만든 북두칠성 등이 복합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건축 모형을 들여다보면 이번 전시의 설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5전시실>은 전시를 보고 난 후 다시 전시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이 전시는 작가의 말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 같아 그의 글 뒷부분을 적어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로서는 기계로 만드는 구원(<늦게 온 보살>), 코믹해지는 제의(<늦게 온 보살>, <모임>), 유치한 기복에 담긴 숭고(<모임>, <병풍>), 재난을 능가하는 자연미(<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 <해인>) 등 이런저런 역설과 아이러니의 언어를 취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순진한 이야기는 거의 예술에서만 가능하고, 그래서 때로 따옴표 친 '미술관'은 어쩌면 현대에 거의 몇 남지 않은 희망의 장소라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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