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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나무의 미술광장
덕수궁 석조전 1편- 석조전 1층 본문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은 덕수궁 안에 있다. 매표소에서 덕수궁 입장권(1,000원/ 아이들은 무료)을 구입하고 들어가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도 덕수궁 안에 있다. 미술관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왔다면 매표소에서 통합 관람권을 구입해도 좋고 입장권만 구입한 다음 안쪽 미술관에서 따로 전시티켓을 구매해도 된다. 오늘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을 관람하러 왔으니 입장권만 구입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10:30분 일반해설 사전예약을 한 상태였다.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시청역 2번 출구
이용시간: 월요일은 덕수궁 전체가 휴무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관람이 가능하다. 그러나 예약이 필수이다.
화요일/공휴일 (5회)
- 심화해설 09:30, 16:30 / 일반해설 11:00, 13:00, 15:00
수/목/금요일 (8회)
- 심화해설 09:30, 16:30 / 일반해설 10:30, 11:00, 11:30, 13:00, 14:30, 16:00
주말 (11회)
- 심화해설 09:30, 16:30 / 일반해설 10:30, 11:00, 11:30, 13:00, 13:30, 14:00, 14:30, 15:00, 15:30
일반해설 45분 / 심화해설 1시간 15분
석조전 내부 대한제국역사관 1층, 2층은 사전예약 없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사전예약은 필수!
덕수궁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아주 간단하게 신청할 수 있다.
사전예약-> http://www.deoksugung.go.kr/schedule/list?scheduleid=SB
관람료: 덕수궁 관람료 1,000원을 내고 들어가면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관람은 무료이다. 만 24세 이하는 무료이니 아이들은 관람료를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주차: 주차 공간 없음.
시청역에 내려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면 대한문이 보인다. 도심 속에 궁궐은 늘 우리에게 쉼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대한문 앞에서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서울시청이 보인다. 덕수궁은 우리가 항상 오고 가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궁궐, 그리고 우리나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보자.
표를 끊고 들어오면 보이는 길이다. 덕수궁은 경복궁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나무 사이로 천천히 걸어 다니기에 좋다. 그러나 원래 덕수궁은 지금의 크기가 아니었고, 현재 규모의 3배 가까이 되었었다고 한다.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해체, 축소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라의 틀을 갖추며 체제를 정비하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 덕수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덕수궁을 일본이 가만히 놔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그저 거닐기 좋은 궁궐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덕수궁은 우리나라의 가장 아프고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궁궐이다.
원래 덕수궁 터에는 조선 9대 임금이었던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들이 살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조선 14대 왕 선조가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처음으로 궁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덕수궁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이후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11년 광해군 이후 경운궁에 다시 왕이 머문 것은 약 280년이 지난 1897년, 조선 26대 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잠시 머물다가 경운궁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고종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경운궁(현 덕수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첫 황궁이 된 것이다.
고종은 황룡포를 입었다. 당시 황룡포는 중국의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고, 중국의 신하인 조선의 왕은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다. 그러나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색깔인 황색을 통해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공표한 것이다. 또한 여러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고,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여러 서양 건축물을 세웠으며, 전각 내 전등과 전화 등의 신문물도 설치하는 등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하였다. 그래서 덕수궁이 다른 궁과 크게 다른 점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겪어낸 공간이기도 하다.
덕수궁 안에서 석조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한문으로 들어와서 직진으로 끝까지 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보통 우리가 전통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근대식 건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석조전은 190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에 완성되었다. 접견실과 대식당 등 공적인 공간과 침실과 서재 등 황실 가족의 생활공간이 갖추어진 대한제국의 대표적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고종 승하 이후 일제강점기에 미술관, 국제회의장,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내부의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었다. 이후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회복하기 위해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보통 덕수궁 안으로 들어와서 석조전 외관은 많이 보았을 것이다. 지층은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나 석조전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1층과 2층의 내부 공간은 사전예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더 이상 쇄국을 통해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고종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지금 보이는 석조전 또한 근대국가로 나아가겠다는 고종황제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지었던 우리로서는 돌로 집을 짓는 전통은 없었기에 돌로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전통식 건물은 설계구조상 건물 한 채에는 기능이 하나씩만 존재했다. 왕의 침전과 정사를 돌보는 편전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석조전은 건물 한채에 층이 3개가 있어 기능도 3개이다. 지층 공간에는 시종들이 준비하는 공간, 1층은 직무의 기능을 갖춘 공간, 2층은 황제 황후의 생활공간으로 각각 기능에 맞춰 나누어져 있다. 즉 침전과 편전이 하나의 건물 안에 공존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조선의 궁궐에서는 없었던 공간 구성이다.
석조전의 중앙 계단을 올라 실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중앙홀이다. 호텔로 따지면 로비라고 볼 수 있다. 고종 승하 이후 일본인들은 석조전의 벽에 붙어 있는 구조물들을 다 뜯어내고 흰 회벽으로 만들어 미술관으로 개관하였었다. 원래의 기능과 다른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9년부터 약 100년 전 도면, 사진, 신문 기사, 카탈로그 등 고증 자료의 검증을 통해 5년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그럼 이 중앙홀은 어떻게 복원할 수 있었을까?
바로 1911년 영친왕을 찍은 이 사진을 통해서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우리나라에 임시로 왔다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고 그 자료를 토대로 중앙홀을 복원할 수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중앙홀 탁자는 창덕궁 희정당에 있던 100년 전 가구를 찾아 원래의 자리로 옮겨왔다. 사진에 보이는 가구 크기와 비교한 뒤 똑같은 비율에 따라 뒤쪽에 있던 구조물들도 원래 크기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눈 앞에 보이는 저 탁자가 100년 전 대한제국 시기에 놓였던 그 가구라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해설사에 인도에 따라 귀빈대기실로 이동했다.
황제를 만나러 오기 위한 손님들이 동시에 모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순서를 기다리며 잠시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행히도 이 귀빈대기실 역시 약 100년 전 사진자료가 있어서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구들이 천으로 덮여 있는 상태여서 중앙홀의 탁자와는 달리 가구의 정확한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더 이상 이 공간을 사용하지 않을 때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방에 돌아온 가구가 2점이 있다. 바로 사진에 보이는 긴 의자와 장식장이다. 석조전의 가구들은 영국의 메이플사 가구 업체에서 직수입한 것들이다. 이 회사에서 가구들을 수출할 때 그냥 보내지 않고 배치 장소를 도장으로 찍거나 손으로 적어놓았는데, 긴 의자와 장식장에는 'RECEPTION ROOM(리셉션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서 현재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가구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의 100년 전 영국산 가구이거나 또는 동시대의 메이플사의 가구들을 다시 사서 구성하였다고 한다.
석조전의 설계, 공사, 인테리어는 영국인이 진행했다. 대한제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서양 건축 문화의 기본인 그리스 로마 건축 양식을 따르는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두드러진 특징은 정확한 비례와 대칭이다. 앞서 본 중앙홀에서도 좌우 대칭구조를 볼 수 있었는데, 귀빈대기실에서도 난로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이 대칭으로 맞춰져 있다. 위 사진을 보면 거울을 기준으로 왼쪽 문으로 들어왔는데, 오른쪽 문은 열어도 뚫려 있는 통로가 없다. 오로지 대칭 때문에 만든 가짜 문이기 때문이다. 벽이 바로 보이면 가짜라는 게 쉽게 탄로 나니 거울을 설치해 실내를 반사시켜 진짜 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대칭 구조 때문에 방 하나에 많은 문들이 있었다.
귀빈대기실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니 석조전 모형과 영상 자료가 설치되어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사진이 남아 있는 공간은 생활사를 재현한 공간으로 복원하였지만, 고증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공간은 이처럼 전시실로 꾸몄다고 한다. 고종은 1895년 경복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를 잃는 을미사변을 겪은 후, 경복궁을 나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들어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에 등극하였는데, 바로 이 시기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던 1897년에 고종은 석조전의 건설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석조전은 영국인 건축가 존 레지날드 하딩(John Resinald Harding)에 의해 설계되었다. 1898년 설계도가 완성되고, 목재 모형을 만드는데 2년의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설계자가 석조전의 도면들을 펼쳤을 때 당시 사람들은 평생 한옥 밖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면들과 그림 속의 석조전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크기의 1/10 나무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는데, 그 모형 제작에 2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현재 전시실에 놓여 있는 모형은 실제 크기의 1/100이다. 당시 모형의 크기는 저 크기의 10배였는데, 말하자면 지금 전시실 방 크기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한옥 한 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이렇게 총 3년이 지난 1900년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0년 만인 1910년에 드디어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접견실이다.
황제를 만날 수 있는 접견실이다. 황제가 있는 곳이다 하여 석조전 실내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위엄 있는 공간으로 설계된 방이다. 순금으로 도금한 벽장식, 수입산 가구들과 카펫, 5개의 샹들리에 등 고가의 물건들로 꾸며져 있다.
특히 지금은 비싸지 않으나 당시에는 부유함의 대명사인 물건이 이 방을 크게 채우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거울이다. 세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대규모의 거울은 예전에는 금과 맞먹거나 금보다 더 비싼 고가의 물건이었다고 한다. 질 좋은 거울을 설치하기 위해 유럽에서 수입했는데, 만들기도 어렵지만 운반 도중 깨지기도 쉬었기 때문에 다루기도 까다로웠던 큰 거울은 당시 부유함과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방들과 달리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李花紋), 즉 오얏꽃무늬를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했다. 이화문의 "이(李)"는 태조 이성계의 성씨에서 따온 것으로 이를 상징하는 꽃인 이화(李花), 즉 오얏꽃을 도안화한 것이다. 이화문은 서양식 관복, 군복, 훈장, 공문서, 동전, 우표, 도자기, 유기 등의 각종 황실과 관련된 것들에 두루 사용되어 대한제국을 상징하였다.
지금의 자두나무를 당시에는 오얏이라고 불렀으며, 간혹 이화여자대학교의 배꽃을 상징하는 '梨花'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배꽃의 배나무리(梨)가 아닌 자두(오얏)나무의 오얏리(李)이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1층에서 관람한 마지막 공간 대식당이다. 공식적인 행사 후 만찬과 연회가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한다.
1918년 대식당 사진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덕수궁 주변으로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 공사관이 덕수궁(당시 경운궁)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 외국인이 참석하는 연회에는 대부분 서양식 코스 요리가 제공되었다. 석조전에도 서양식 만찬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대식당의 식탁 위에 대한제국 시기의 서양식 만찬 장면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해설사 분이 설명을 하시다가 한쪽에 있던 유리벽 안의 불을 켜자 보이지 않던 석조전의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석조전은 전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화강암으로 지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복원을 위해 안의 내부를 뜯어 냈더니 안쪽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것이 드러났다.
이 공간뿐만 아니라 석조전 안의 모든 내부는 적벽돌로 쌓아 올린 구조로 되어 있고 바깥벽만 화강암으로 마감된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면 밧줄이 감긴 배관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보일러 배관으로 2층에 온수를 올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겨울철 동파를 막기 위해 새끼줄로 감아 논 것이다.
여기까지가 일반해설로 감상한 석조전 1층의 모습이다.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그 위상에 걸맞게 궁궐을 확장한 고종. 실제로 석조전 내부로 들어와 복원한 공간들을 둘러보니, 근대국가를 세우고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히고 싶었던 고종의 뜻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석조전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근대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석조전 2층에서는 황제 침실, 황제 서재, 황후 거실, 황후 침실, 테라스 등을 관람하였다.
꼭 봐야 할 덕수궁 석조전 2층(황제 가족의 생활공간과 테라스)은 바로 여기 https://artsquare.tistory.com/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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